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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던 필 - 놉 (2022)취미/영화 2025. 12. 28. 15:38

하늘에서 내려오는 공포
조던 필 감독의 『놉』은 캘리포니아 외곽 목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오티스 "OJ" 헤이우드 주니어는 할리우드 영화 촬영용 말을 조련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 아버지가 하늘에서 떨어진 정체불명의 물체에 맞아 죽는다. 동생 에메랄드는 오빠와 정반대 성격인데 유명해지고 싶어 하고, 조용한 일상을 견디지 못한다. 근처에 리키 "주프" 박이 운영하는 테마파크가 있다. 주프는 어린 시절 아역 스타였다. 이들은 하늘에서 나타나는 무언가를 각자의 방식으로 쫓기 시작하면서 영화가 진행된다.
『겟 아웃』과 『어스』를 만든 조던 필답게 『놉』도 단순한 오락 영화가 아니다. 장면 하나하나가 의미를 담고 있으니 해석은 관객의 몫이다. 그냥 무서운 장면만 보고 싶은 것이라면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왜 이 장면이 여기 나올까",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고 곱씹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영화다. 또한 12세 관람가인 만큼 전작들만큼 잔인하거나 공포스럽지는 않다. 대신 무서울 법한 순간마다 웃을 수 있는 요소가 끼어든다. 긴장하게 만들고 때로는 풀어주는 균형이 상당히 절묘하게 다가왔다.
침팬지가 폭주한 날
영화는 이상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평범한 미국 가정에서 고디의 생일 파티를 연다. 그런데 고디는 사람이 아니라 침팬지다. 이 가족은 실제 가족이 아니고 리얼리티 쇼 출연자들이며 침팬지를 주인공으로 한 프로그램은 큰 인기를 끌었고, 동양인 아역 배우 주프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생일 파티 장면에서 누나가 풍선 가득 든 상자를 연다. 풍선이 쏟아지며 소리를 낸다. 그 순간 고디가 돌변한다.
고디는 주프를 제외한 출연자들을 공격하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다. 주프는 테이블 밑에 숨어서 이 광경을 지켜본다. 고디가 테이블 밑으로 다가와 주프와 눈이 마주친다. 다른 사람들처럼 공격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디는 주먹을 내민다. 주프가 주먹 인사를 받으려는 순간 총성이 울리고 고디는 쓰러진다. 이 장면은 영화 본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끝까지 직접적으로 설명해주지 않는다. 관객이 알아서 연결하라는 뜻이다.
고디는 왜 폭주했을까. 풍선이 갑자기 쏟아지며 낸 소리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물에게는 건드리면 안 되는 금기가 있다. OJ가 촬영장에 말을 데려갔을 때 스태프에게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누군가 말에게 거울을 비추자 흥분해서 뒷발로 바닥을 차버린다. 결국 OJ는 쫓겨나고 촬영은 모형 말로 대체된다. 고디나 말이나 같은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나오는 진 재킷도 마찬가지다.
눈을 마주치면 죽는다
괴비행물체인 진 재킷은 처음에 UFO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는 생물이다. 진 재킷에게도 금기가 있다. 똑바로 쳐다보면 안 된다. 말 조련사로 일하면서 동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면 흥분한다는 걸 알고 있는 OJ는 이 사실을 일찍 깨닫는다. 진 재킷을 쳐다보면 잡아먹히고, 보지 않으면 지나간다. 금기를 지키면 살고, 어기면 죽는다. 고디 장면과 똑같은 구조다.
앞서 말했던 침팬지가 폭주한 날 한 신발만큼은 똑바로 서있는 장면이 있다. 아수라장 속에서 똑바로 서 있던 신발은 뭘까. 신발은 원래 혼자 똑바로 서 있기 힘들다. 그런데 그 혼란 속에서도 꼿꼿이 서 있었다. OJ는 나중에 "나쁜 기적"이라고 부른다. 비극 한복판에서 일어난 기적 같은 현상이다. 전쟁터에 핀 작은 꽃, 참사에서 혼자만 살아남은 상황 같은 것 말이다. 주프가 그렇다. 다른 출연자들은 모두 고디에게 공격당했는데 주프만 살아남았다. 똑바로 서 있는 신발과 주프는 같은 의미다. 그래서 감독은 주프의 시선에서 그 신발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영화 제목 '놉'은 나쁜 기적의 반대편에 있다. 나쁜 기적이 비극 속 기적이라면 놉은 비극 그 자체다. 인간은 거스를 수 없는 비극 앞에서 절망한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고 어떤 시도도 소용없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진 재킷 앞에 놓인 OJ와 에메랄드가 그렇다. 진 재킷은 거대한 생물체로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인간을 빨아올려 잡아먹는다. 크기는 개인이 감당할 수 없고, 무심코 쳐다보기만 해도 표적이 된다. OJ와 에메랄드가 진 재킷을 목격하고 나서 "놉, 놉" 하고 중얼거린다. 비극 앞에서 절망한 사람이 내뱉는 말이다.
죠스가 하늘에서 온다면
공포 장르 중에 코스믹 호러가 있다. 우주적 공포라는 뜻인데, 대항할 수 없고 절망적인 상황을 다룬다. 『놉』은 마지막에 에메랄드가 거대한 풍선으로 진 재킷을 물리치니까 완전한 코스믹 호러는 아니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범접할 수 없는 존재 앞에서 느끼는 절망을 제대로 보여준다. 포스터를 보면 인물들이 하나같이 위를 쳐다본다. 하늘에서 무언가가 나타나 그들을 절망에 빠뜨린다는 뜻이다.
진 재킷이 하늘에서 나타나는 걸 바다로 바꾸면 『죠스』가 된다. OJ가 사는 곳은 외딴 마을이라 인적이 드물다. 망망대해 같다.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진 재킷은 바다 속에 숨어 있다 습격하는 상어와 비슷하다. 하지만 하늘에서 무언가가 습격한다는 설정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그래서 신선하다. 조던 필은 『클로즈 인카운터』, 『죠스』, 『사이코』 같은 고전을 참조하면서도 자기 방식으로 풀어냈다. 촬영 감독 호이테 판 호이테마가 찍은 하늘과 밤 풍경은 정말 아름답다.
쳐다보는 것도 폭력이다
영화는 인간이 저지른 폭력과 그 대가를 다룬다. 침팬지 고디는 TV 쇼를 위한 동물이다. 사람들은 야생동물을 스튜디오에 데려와 뜨거운 조명 아래 세우고 카메라로 찍으며 사람처럼 행동하기를 강요한다. 고디가 아무리 사람처럼 행동해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결국 폭발한 침팬지는 출연진을 공격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다. 주프만 살아남았다. 주프는 이 사건을 통해 자신이 동물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나중에 하늘의 UFO를 자기 명성을 올릴 쇼 소재로 삼으려다가 최후를 맞는다.
OJ는 말 조련사다. 말을 다룰 줄 안다는 건 동물과 소통할 줄 안다는 뜻이고, 그들을 존중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동물을 오락거리로 여길 때 OJ는 진심으로 말을 대한다. 그래서 진 재킷의 눈을 마주치면 안 된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동물 훈련을 하면서 바라보는 행위 자체가 동물을 흥분시킨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진 재킷 앞에서 사람들은 신기한 구경거리를 찍으려고 카메라를 들고 몰려든다. OJ 남매도 처음엔 CCTV를 달았다. 하지만 그런 시선 자체가 진 재킷에게는 폭력이다. 결국 진 재킷을 흥분시켜 위험을 자초한다.
영화는 동물을 소재로 쓰지만 의미는 훨씬 넓다. 우리가 사회에서 은연중에 행하는 무언의 폭력과 차별에 적용할 수 있다. 조던 필은 『겟 아웃』과 『어스』에서 인종 차별을 다루며 의도적인 불편함을 만들었다. 『놉』도 마찬가지다. 동물 대신 소수자를 넣어도 똑같이 해석된다. 우리는 그저 다르니까 신기해서 쳐다본다. 그런데 그 대상은 그 시선 자체를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OJ가 한사코 "보지 마"라고 외친 건 관찰 대상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그걸 무시한 사람들이 최후를 맞는다.
내면적 연기와 슬로우 번
다니엘 칼루야와 케케 팔머의 남매 연기의 케미가 상당히 좋다고 느꼈다. 칼루야는 『겟 아웃』에서 감정과 반응을 끊임없이 드러냈는데 『놉』에서는 정반대다. 조용하고 명상적이다. 흑인 배우가 스크린에서 내면적 연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많지 않았기에 반가운 선택이다. 스티븐 연도 훌륭하다. 분량은 적지만 역할은 중요하다. 케케 팔머는 인터넷에서 밈으로 유명해서 본인 캐릭터와 배역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연기력은 확실하다. 일부 백스토리가 더 발전했으면 감정적 임팩트가 컸겠지만 그래도 남매 관계는 충분히 감동적이다.
『놉』은 여러 주제와 은유를 담고 있다. 조던 필은 쉽게 소화할 수 있으면서도 여러 겹을 남겨놨다. 과도하게 분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된다. 스필버그와 비교되지만 M. 나이트 샤말란의 영향도 보인다. 특히 『사인』의 생일 파티 장면처럼 관객의 본능적 반응을 끌어내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는 슬로우 번으로 진행된다. 긴장감을 천천히 쌓으면서 긴급함을 만들어낸다. 『놉』은 기대를 뒤집으며 영화가 느려질 때도 관객을 붙잡아둔다. 조던 필은 인터뷰에서 서스펜스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별일을 일어나지 않게 해서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거라고 했다. 관객은 어디로 가는지 안다. 다만 언제 도착할지 모를 뿐이다.
야심만 컸던 영화
『놉』은 2시간이 넘으며 3막 끝부분에서 조금 늘어진다. 마지막 15분은 편집으로 좀 더 다듬을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보는 내내 지루하지는 않았다. 조던 필의 장점이자 무서운 점은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아직 성장할 여지가 많다는 것이다. 『놉』은 『겟 아웃』과 『어스』의 스릴러, 공포 장르에서 약간 벗어났다. 다음 작품에서 뭘 보여줄지 궁금하다.
『놉』은 완벽하지 않다. 야심찬 개념 속으로 자꾸 사라진다. 하지만 신선한 소재와 생각할 거리, 오락성은 갖췄다. 전작들과 비교하면 부족한 부분이 있지만 12세 관람가로 만든 건 의도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교육적이고 철학적 의미에 더 신경 쓴 것 같다. 외계인 영화 껍데기를 쓴 사회 비판 영화로 봐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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