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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욱 - 스토커 (2013)취미/영화 2025. 12. 18. 22:00

뒤틀린 성장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는 한국 감독이 할리우드 배우들과 함께 만든 첫 영어 영화다. 2013년 개봉했을 당시 미아 바시코브스카, 니콜 키드먼, 매튜 구드 같은 유명 배우들이 출연한다는 점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그러나 스토커의 진짜 매력은 역시나 박찬욱 감독이 만들어낸 기묘하고 불안한 분위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인디아(미아 바시코브스키)의 열여덟 살 생일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은 후 어머니 이블린(니콜 키드먼)과 큰 저택에서 둘만 남게 된다. 장례식 날 불쑥 찾아온 찰리 삼촌(매튜 구드)은 인디아가 존재조차 몰랐던 인물이다. 찰리는 유럽에서 사업을 하다 돌아왔다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집에 머물게 되는데 인디아와 찰리 사이에는 말 없이도 통하는 이상한 연결점이 있고 마치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씬들이 이어진다.
영화는 처음부터 불안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인디아는 내레이션으로 자신의 초자연적인 청각에 대해 말하며 키 큰 풀밭에서 동물을 사냥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인디아의 청각은 너무 예민해서 거미가 걷는 소리까지 들을 수 있을 정도다. 이 장면에서도 박찬욱의 전작 『박쥐』처럼 섬뜩하고 세밀한 사운드 디자인이 단연 돋보인다. 찰리라는 이름은 히치콕의 『의혹의 그림자』에 나오는 찰리 삼촌에 대한 모티브로 보인다. 그렇기에 찰리가 흔히 말하는 ‘악’의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영화를 보게되는 것이다. 히치콕의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묘한 가족 관계
인디아와 어머니 이블린은 서로를 경멸하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어 보이지만 둘 다 같은 남자에게 집착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첫 대상은 아버지였고 이제는 찰리 삼촌으로 넘어왔다. 재키 위버가 또 다른 먼 친척으로 등장하는 초반 장면은 약간 웃기면서도 긴장감이 느껴진다. 카메라가 계속 식탁 주위를 돌고 맴도는 가운데 아무도 제대로 된 식사보다는 서로에 대한 혐오만 먹고있는 것처럼 보인다.
앞서 말했듯 박찬욱은 찰리의 사악한 본성을 처음부터 알려준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거리를 두는 가족간의 관계에 대한 이유는 오히려 숨긴다. 영화 초반에 이블린은 딸에게 쇼핑을 하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는데 인디아는 비아냥거리는 투로 거절하고, 이블린은 "아버지랑은 사냥을 자주 가면서 나랑은 왜 반나절도 함께 보내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인디아는 영화 내내 어머니에게 보통의 가정에서 볼 수 없는 무시하고 깔보는 듯한 태도로 일관한다. 이것은 평소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보이던 태도를 그대로 모방한 결과로 보인다. 인디아는 어머니를 모델로 삼지 않고 아버지를 모델로 삼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체적 정체성은 여자이지만 정신적 정체성은 남자가 되어버린 것이고 결국 집단 내에서 사람들과 교류하기 어려워하는 인물로 성장했다.
억눌린 욕망
인디아는 마음 속 자신이 느끼는 혼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이런 혼란이 폭발하는 순간은 영화 중간부에서 볼 수 있다. 평소 자신의 유일한 친구였던 윕 테일러와 키스를 하다가 갑자기 그를 뿌리치는 장면이 있다. 자신의 신체적 정체성은 여자이지만 정신적 정체성은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와 사랑을 나누면 자신의 신체적 정체성과 정신적 정체성이 부딪히는 상황을 막기 위한 행위라고도 해석할수 있겠다. 하지만 윕은 계속해서 키스 이상의 스킨십을 원하고 인디아는 점점 더 큰 신경증적 감정을 떠안게 되고 결국 그를 죽인다. 윕을 죽이고 온 후 샤워를 하면서 자위행위를 하는 장면은 자신의 신체적 정체성과 정신적 정체성의 마찰로 인한 커다란 신경증적 감정을 오르가슴을 통해 해소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
영화 곳곳에는 인디아가 아버지와 사냥을 함께 하는 장면이 삽입되어있다. 사냥은 곧 인디아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한 남성성을 상징한다. 결국 인디아는 연쇄 살인마인 삼촌을 아버지와 함께 사냥 연습을 하면서 사용했던 총으로 쏴 죽이게 된다. 삼촌 찰리는 인디아의 아버지와 주위의 친척들을 모두 살해하고 인디아의 어머니까지 살해하려 한 사이코패스다. 찰리를 죽이고 인디아는 집에서 나와 길을 떠난다. 그리고 무작위로 사람을 사냥하는 인디아의 모습을 끝으로 영화가 끝나고, 이것은 영화 처음의 내레이션과 연결된다. 인디아는 자신의 정신적 정체성을 완벽히 확립했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으며 처음에 나오는 인디아의 내레이션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인 것을 알 수 있다.
자유와 책임
인디아의 내레이션은 이렇다. "내 귀는 남이 못 듣는 것을 듣고 내 눈은 남이 못 보는 작고 먼 것을 봐. 이런 감각은 오랜 열망의 산물이야. 구출되거나 완성되고 싶은... 바람이 불어야 치마가 날리듯 난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이뤄지지 않았어. 어머니 블라우스 위로 아버지의 벨트를 했고 삼촌에게서 받은 구두를 신었거든. 이게 나야. 꽃이 자기 색을 고를 수 없듯 내가 무엇이 되든 그건 내 책임이 아니야. 그걸 깨달아야 자유로워지고 어른이 된다는 건 바로 자유로워진다는 거야." 인디아는 찰리를 죽임으로써 가정이라는 사회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즉, 연쇄 살인마 삼촌을 죽인 인디아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어머니를 죽음으로부터 구해주지만 어머니를 구하는 구원자의 행동이 아니라 그저 삼촌을 사냥총으로 쏴버린 사냥 행위에 가까웠다.
인디아의 사냥 행위가 가정의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 되어버린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인디아는 이제 신체적 정체성과 정신적 정체성의 합일을 이루어냈기에 자유롭게 집 밖으로 나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인간을 사냥하는 사냥꾼이 되어버렸다. 이것은 인디아의 정신적 측면에서는 축하를 전해야 할 일이면서 잔인한 범죄자가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큰 아이러니라고도 할 수 있다. 결말은 반전이라기보다는 『박쥐』의 메아리를 떠올리면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조금 더 구체적이고 더 불쾌할 뿐이다.
빼놓을 수 없는 영상미
『스토커』는 처음부터 분위기를 조성하고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완벽하게 구축하는 어둡고 뒤틀린 분위기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모든 샷은 매우 명확하고 모든 편집은 거장적이며 조명도 섬세하게 처리되었다. 시각적 스타일은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찰리와 인디아의 피아노 시퀀스 편집은 숨 막힐 정도로 가장 잘 편집된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박찬욱은 2003년 『올드보이』로 전 세계 관객을 사로잡았다. 불운한 등장인물들이 근친상간을 저지르고 살아있는 문어를 먹는 이국적인 복수 판타지였지만 『스토커』는 덜 자신감 있고 더 비틀거리는 작품으로 느껴진다. 박찬욱이 자신의 조각되고 화려한 미학을 미국 환경에 적응시키려고 애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박찬욱은 분명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때때로 과시하는 것을 참지 못해 방해가 되는 지점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불편한 걸작
『스토커』 안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세상이지만 모든 작은 것에 대한 설명 없이도 이해가 된다. 영화는 관객에게 이 어두운 세계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빠져들 것을 요구한다. 이런 피로 물든 영화치고는 이상하게도 카타르시스가 없는 편이기도 하다. 박찬욱이 찰리 삼촌을 가족 역학에 매끄럽게 끼어들게 만들면서 성적이고 다른 방식으로 참을 수 없는 긴장감을 만들어내지만 결말은 불편하다. 전화 통화가 포함된 한 살인 장면은 그 단순함 때문에 악몽을 줄 것이고, 영화는 섬뜩하게 양식화되고 공격적으로 섬뜩하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의 인간 정신에 대한 고찰과 예리한 시선이 느껴져 재미있게 보았던 영화였다.
색채와 상징으로 읽는 성장의 서사
박찬욱은 『스토커』에서 색채와 사물을 통해 인디아의 정체성 변화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영화 속에서 노란색은 스토커 가문의 본능적 폭력성을 상징하고, 빨간색은 성숙한 여성성을 의미한다. 찰리는 인디아에게 노란 우산을 건네지만 인디아는 이를 거절한다. 찰리가 오로지 노란색만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라면, 인디아는 두 가지 색을 모두 수용하며 새로운 존재로 거듭난다. 찰리가 바닐라와 초코 아이스크림을 따로 담아온 것과 달리 인디아는 이를 섞어 먹는 장면은 그녀가 본능과 여성성을 통합해가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영화 말미 경찰관의 피가 노란 중앙선에 뿌려지고, 찰리의 노란 옷과 양탄자가 피로 물드는 장면들은 이러한 통합의 완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사물 또한 인물의 내면을 드러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한다. 찰리가 사용하는 벨트는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을 쾌락으로 즐기기 위한 살인 도구다. 반면 인디아는 총을 사용함으로써 그 쾌락을 제거한다. 아버지가 사냥을 가르친 이유는 찰리처럼 쾌락에 빠진 살인마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고, 인디아는 결국 벨트를 본래 용도로 착용함으로써 절제를 선택한다. 찰리에게서 받은 뱀가죽 구두는 포식자로서의 본성을 상징하며, 인디아가 마지막에 챙기는 뉴욕행 자료가 담긴 뱀가죽 다이어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새를 사냥하는 뱀처럼 인디아는 찰리를 사냥하는 존재로 성장한 것이다.
영화 속 수직적 공간 또한 권력 관계를 암시한다. 찰리에게 계단과 높이는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그는 어린 시절 동생이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자 땅속에 파묻어 자신이 내려다볼 수 있게 만들었다. 찰리의 계획은 인디아를 자신과 동등한 높이로 끌어올리는 것이었고, 구두 선물 역시 계단 꼭대기에서 이루어진다. 인디아가 찰리의 정신병원 기록을 알고 난 후 계단을 오르다 멈추는 장면, 회전 놀이기구에서 자신의 숨겨진 본능을 인식한 직후 미끄럼틀 위로 올라가 상대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모두 권력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거미는 인디아에게 접근하는 찰리를 상징한다. 장례식 추모사에서 강조되는 건축이라는 단어는 찰리가 짜놓은 거미줄 같은 계획을 암시하며, 거미가 치마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그가 인디아를 성적 대상으로 삼고 있음을 드러낸다. 찰리가 죽자 거미는 그저 지나갈 뿐이다. 새 역시 찰리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그가 고모할머니를 죽일 때 방송에서 나오는 새의 사냥법, 인디아가 편지를 발견할 때 조명등에 새겨진 새 문양은 모두 찰리의 정체를 암시한다. 어머니가 박제된 새를 태우는 장면은 그에 대한 감정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디아는 아버지에게 배운 새 사냥법으로 찰리를 처단하며 성숙한 존재로 거듭난다.
빨간색이 성숙한 여성성을 나타낸다면 어머니가 입는 검정과 파랑이 섞인 어두운 옷은 남편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뜻, 그러니까 여성성이 상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가 찰리에게 가까워지려고 하고 딸을 미워하는 이유는 인디아의 탄생으로 남편의 사랑을 잃었기 때문이다. 인디아가 남학생을 공격할 때 사용한 노란 연필은 폭력적 공격성을, 흐르는 빨간 피는 성적 모욕에 대한 반응을 나타낸다. 결국 인디아는 어머니의 블라우스로 여성성을, 찰리의 뱀가죽 구두로 포식자의 본성을, 아버지의 벨트로 인내와 절제를 모두 갖춘 존재로 완성된다. 이는 쾌락을 위한 살인자가 아니라 인내를 갖춘 사냥꾼의 탄생이며, 엔딩 주제곡이 말하는 나만의 색깔을 찾았다는 의미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
나에게는 스토커가 인디아가 성숙한 존재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된다. 초반부 인디아가 식탁 위에서 삶은 달걀을 굴려서 깨뜨리고 있는 장면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어쩌면 가족력이라고도 할 수 있는 타고난 기질과 본능, 주변인들과의 관계, 그리고 일련의 사건들이 모이고 모여서 영화 마지막의 '인디아'가 완성된다.'취미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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