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이용주 - 불신지옥 (2009)
    취미/영화 2025. 12. 20. 23:43

     

    공간을 활용하는 법

    한국에서 잘 만든 공포영화를 꼽으라면 『불신지옥』을 고를 것이다. 『건축학 개론』으로도 유명한 이용주 감독의 데뷔작인 불신지옥은 공간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중심이 배경인 낡은 아파트는 지하실부터 옥상까지, 층간 관계, 방과 방 사이의 구조, 베란다의 디테일까지 모두 빠짐없이 사용된다. 이정도면 아파트라는 공간 자체가 하나의 캐릭터처럼 느껴질 정도다. 건축공학과를 전공한 덕인지 이용주 감독은 공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할 지 잘 알고, 그것을 관객에게 체감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극을 이끌어가는 희진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며 여러 알바를 전전한다. 감기를 달고 살면서도 자취방과 알바를 오가는 신세다. 2009년 작품이지만 그녀의 삶은 지금의 청년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매일을 전쟁 속에서 사는 희진에게 엄마는 기도를 해야 천국을 갈 수 있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울분을 터뜨리며 "난 지금이 지옥이야, 알아?"라는 말로 답한다. 이후 동생 소진이 사라졌다는 전화를 받고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와 낡고 음산한 아파트 앞에 섰을 때 우리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는 물론, 그녀의 삶 전체에서 풍겨나오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가장 한국적인 공포

    이 영화는 굉장히 한국적이다. 희진의 삶이 한국 청년들과 비슷해서만은 아니다. 미디어가 잘 드러내지 않는 허름한 아파트의 모습, 등장인물들의 리얼리즘, 억지스러운 설정 없이 어느 것 하나 과장되지 않았다. 모두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느껴왔던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한국의 기독교와 무속신앙이 뒤섞이는 장면들은 이 영화가 왜 한국에서만 나올 수 있는 공포영화인지를 잘 보여주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초반부에는 엄마가 교회에서 돌아와 현관문을 여는 장면이 나온다. 문에는 열쇠구멍이 여러 개 달려 있다. 엄마는 자물쇠를 열었다가 잠그고, 다시 열었다가 문을 당기고 결국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리며 당황한다. 이 장면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건 현관 팻말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적혀 있지만 그 뒤에는 수많은 자물쇠가 숨어 있다. 종교에 모든 것을 거는 엄마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게 뭘까. 다른 집들도 마찬가지다. 여러 개의 잠금장치에 감옥 같은 방범창까지 설치했다. 무너지는 중산층의 두려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점프 스케어 없는 공포

    공포영화의 미덕은 말 그대로 관객에게 공포를 주는 것이다. 이 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쉽고 게으른 방법은 마구잡이로 놀래키는 것이다. 점프 스케어가 그 대표적인 예다. 점프 스케어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불신지옥』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 단 한 번의 점프 스케어도 없이 관객에게 공포를 심어준다. 그 공포는 우리 삶과 밀접한 등장인물과 모습들에서 자연스럽게 공감을 끌어낸다. 지금 당장 우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다를 바 없는 배경을 보여주면서 영화 속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을 더욱 몰입해서 느끼게 만들고 『불신지옥』에서 공포를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배우들의 연기 역시 한 몫 했다. 희진 역을 맡은 남상미 배우는 연기를 가장 잘하는 배우는 아니더라도 희진이라는 역할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배우다. 심은경의 신들린 연기는 두말할 것 없고, 태완 역의 류승룡도, 장영남도 훌륭하다. 그러나 가장 뛰어난 건 엄마 역의 김보연이다. 이들의 연기가 없었다면 이 영화가 만들어내는 몰입감은 상당히 떨어졌을 것이다.

     

    믿음에 대한 질문

    『불신지옥』이라는 제목은 영화 내내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믿음이 무엇일까? 믿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어째서 무엇인가를 믿게 되는 걸까? 영화의 캐치프레이즈는 "믿습니까?"다. 영화는 끝없이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당신이 믿는 것을 믿느냐고, 나아가 당신은 무엇을 믿느냐고. 우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아마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고뇌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어째서, 어떤 방식으로 믿느냐고. 믿지 않는다면, 당신은 믿지 않음을 어떻게 믿느냐고.

     

    영화는 희진, 엄마, 소진을 통해 세 가지 믿음을 보여준다. 희진은 현대 과학 혹은 무신론을 의미하고, 엄마는 기독교를, 소진은 무속신앙을 의미한다. 마지막 옥상 장면에서 무속신앙은 이미 죽었다. 무신론과 기독교는 대립하다 결국 두 종교 모두 추락한다. 그리고 그 순간 무속신앙은 다시금 살아 있음의 가능성을 넌지시 던진다. 감독은 어쩌면 우리가 흔히 과학적이라 여기는 것들도 결국 과학적인 것이 더 훌륭하다는 믿음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신이 있다는 증거도 없으나 없다는 증거도 없는 것은 사실이며 우리가 신이 없다는 사실을 맹신하는 굉장히 모순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을 역설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기심과 욕망

    소진은 신이 내린 아이였다. 무당이 그녀를 이용해 영적 존재를 불러들이고 소진이 흘린 피로 부적을 만든다. 암에 걸린 여자는 그 부적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지만 소진에게 영적 존재가 접신이 잘 안 되자 어린 소진에게 가혹한 방법을 썼다. 결국 영적 존재가 화가 나고 만다. 영화에 등장하는 무당, 자신의 병이 낫기 위해 소진에게 부적을 쓰라고 강요하는 여자, 주저하면서도 결국 그들에게 동조하는 젊은 여자, 과거 참전용사로 경비복인지 군복인지 모를 옷을 입고 다니는 경비원. 이들은 각각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상한 사이비 세력, 점점 이기적이 되어가는 30대, 방관적이고 무책임한 20대, 그들을 내리누르는 권위와 권력과 폭력의 망령들.

     

    두려움에서 비롯된 믿음은 믿는 그들 자신뿐만 아니라 그 믿음의 대상인 그 무엇도 망쳐버린다. 이를 가장 잘 반영하는 캐릭터는 소진의 엄마다. 그녀의 지나친 맹신은 남편과 아이의 사고, 그리고 그 이후 남편의 죽음과 아이의 후유증이라는 삶의 고통과 큰 관계가 있다. 그녀 또한 소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자들 중 한 명이다. 희진은 병원을 믿지 않는 엄마를 못마땅해하지만 결국 본인도 병원에 가보라는 약사의 말을 거절한다. 이는 이후 경찰을 믿지 않는 엄마에 대한 태도로도 드러난다. 결국 본인도 종국에는 경찰들의 말을 믿지 않게 된다.

     

    맹신의 반대말

    맹신의 반대말은 불신이 아니다. 영화 속 가장 믿지 않는 캐릭터인 형사 역시 긍정적인 인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소진의 죽음에 이 형사 역시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사건 초기에 형사 역시 단순 가출에 불과하다며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의 제목이 맹신지옥이 아니라 불신지옥임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믿거나, 아예 믿지 않거나 모두 어떤 위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인다.

     

    절체절명의 순간, 소진이가 부활했다는 엄마의 말에 희진은 분명 소진이가 죽었다고 믿었는데도 소진이가 살아났다는 믿음에 뒤를 돌아본다. 이 참으로 역설적인 장면은 결국 우리에게 믿음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주기도 하며, 어쩌면 믿음의 통합으로도 해석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어떻게 되었든 이 고통의 시기에 야만의 시기에 우리는 무엇을 믿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맹신의 반대말은 아마도 회의에 가까울 것이다.

     

    신병과 학의 의미

    영화에는 신병이라는 개념을 다루고 있다. 신이 깃들기 전 이유 없이 아픈 것을 뜻하는데, 감기를 달고 살던 희진이 그러했고, 태완의 딸이 그러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빙의가 일어난 이후 옥상에서 희진은 단 한 번도 기침을 하지 않는다. 태완의 딸은 갑작스럽게 병이 치료되어 희진에게 보였던 학을 바라본다. 학을 매개로 신이 옮겨감을 알 수 있으며, 소진이 사라진 날부터 희진에게 귀신이 보임으로 말미암아 원래 이 신은 소진에게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학은 신이 내린 사람에게 보이는 형상이다. 보통 신이 내린 사람들은 꿈이나 그런 형상을 목격함으로써 자신에게 신이 내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놀이터에서 학이 물어간 이빨의 경우 꿈에서 이빨이 빠지면 가까운 사람이 죽는다는 설과 맞물려 물어간 이빨 수만큼 영화 속에서 사람이 죽어간다. 즉, 영화 속에서 죽은 네 사람은 모두 타살이 아닌 귀신에 씌여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이 맞다.

     

    한국 공포의 정수

    『4인용 식탁』과 『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이 『불신지옥』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대한민국을 강타한 『곡성』의 밑그림이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불신지옥』은 한국 문화권을 경험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작용하는 힘이 너무나도 다르다. 한국 문화권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아주 특별한 경험으로 다가올 것이라 확신한다. 이용주 감독이 언제쯤 다시 공포 장르에 발을 들일지 늘 기대하고 있는 중이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