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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동혁 - 남한산성 (2017)
    취미/영화 2025. 12. 29. 20:28

     

    정의와 정의의 싸움

    황동혁 감독의 『남한산성』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김훈 작가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1636년 겨울,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한다. 인조와 조정은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지만 식량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채 혹독한 추위 속에 갇혀버린다. 영화는 이 47일간의 포위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사극 영화 하면 으레 떠올릴 수 있는 화려한 전투 장면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대신 신하들의 치열한 설전이 영화를 가득 채운다.

     

    영화는 진행되는 내내 주화파와 척화파가 맞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조판서 최명길은 청과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조판서 김상헌은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맞선다. 둘 다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은 같지만 생각이 다를 뿐이다. 영화는 이 둘 중 누가 옳은지 쉽게 판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김상헌에게 인간적 매력을 부여하고, 그가 느끼는 동정심도 보여준다. 덕분에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정의와 정의의 충돌로 느껴진다.

     

    최명길은 지금 치욕을 견디고 후일을 도모하자고 말한다. 김상헌은 끝까지 싸워 대의를 지키자고 맞선다. 관객은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 내가 저 상황이라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현대에도 자주 논의되는 실리와 명분의 문제다. 친미냐 친중이냐, 친일이냐 반일이냐 같은 무거운 주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누가 옳은지 단정 짓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무능한 지도자

    영화에서 김류보다, 청나라 군대보다 더 나쁜 건 무능한 지도자인 인조다. 역사의 평가도 그렇고 영화 속에서도 그렇게 그리고 있다. 말로는 백성을 걱정한다고 하지만 산성에 피신한 백성들의 실상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다. 아니, 애초에 알려고나 했을까. 영화 속에서 표현된 건 실제 역사에 비하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이 무능하면 개인이, 집단의 우두머리가 무능하면 집단이, 나라의 우두머리가 무능하면 나라 전체가, 백성이 피해를 볼수밖에 없다.

     

    인조의 무능함은 "아껴서 분배하되, 너무 아끼진 말게 하여라"라는 대사 한마디로 요약된다. 지침도 제대로 안 주고서 고압적인 자세로 두루뭉술한 업무 지시만 한다. '가마니와 말고기' 장에서 인조의 무능함을 자세히 묘사한다. 악당보다 더 나쁜 게 위선자다. 오늘날 뉴스에서, 직장에서, 사회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라 더 씁쓸하다.

     

    영의정 김류는 내부의 적이다. 더 무서운 건 자기가 내부의 적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김류는 인조반정의 주동자로 1등 공신이 되며 영의정까지 올랐다. 하지만 역사 속 평가도 그렇고 영화 속에서도 일관되지 않은, 자신의 안위만 우선으로 삼는 모습을 보인다. 뼛속까지 사대부라고 실리보다 명분을 추구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큰 손해를 가져온다. 최명길을 강력하게 비판하다가도 이후 그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한다. 영화 속에서 김류의 다양한 말 바꾸기를 볼 수 있다.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해 뱉은 말을 주워 담거나 모른 척하는 내부의 적, 오늘날의 그분들이 떠오른다.

     

    백성의 고통

    영화는 백성의 고통을 차갑게 보여준다. 작중에서 대장장이 서날쇠의 말대로 사실 이 이데올로기 전쟁은 백성들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그저 굶지만 않아도 만족한다. "소인은 전하의 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봄에 씨 뿌리고 가을에 추수해 한해 배불러 보는 게 꿈입니다." 이 대사는 사상을 위해 손에 피 묻히는 것도 불사한 김상헌에게 큰 영향을 준다. 유언도 비슷한 뜻으로 남긴다.

     

    영화 초반 부분 김상헌과 나루터 노인이 나온다. 노인은 산성으로 가는 길을 조선 왕실에 알려줬는데 좁쌀 한 되 받지 못했으니 청나라 군사들에게 길을 알려주고 쌀이라도 조금 받겠다는 말을 김상헌 앞에서 꺼낸다. 김상헌은 노인에게 성에 같이 가자고 말하지만 노인은 거부한다. 결국 칼로 노인을 벤다.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였을 것이다. 지금 현 시대도 그렇지 않을까. 결국 역사는 돌고 도는 걸 다시 한번 생각나게 만드는 스토리다.

     

    이 말대로 이데올로기는 사실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예로부터 세상은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사상을 더 중히 여기는 풍조가 있다. 영화를 보면 이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상 인물인 칠복이와 나루를 이용해 극적 요소를 배가시켰고, 나루가 김상헌에게 이야기하던 민들레꽃은 민초들의 평화를 의미하며 마지막 장면과 함께 여운을 남긴다.

     

    매력적인 배역들

    배우 박희순이 맡은 이시백이라는 역할은 영화를 본 많은 사람이 매력적인 배역이라고 평했다. 고립된 남한산성 속에서 뛰어난 무력과 인품을 지니고 있어 신뢰감을 뿜어내는 존재였다는 점, 관객들에게 암적 존재인 김류와 대립했다는 점 등 여러모로 매력적인 배우가 매력적인 배역을 맡았다. 역사 속의 실제 이시백은 무관이 아닌 문관이었다고 전해지지만, 그가 방비를 맡았던 남한산성 서쪽에 적의 야습이 있었을 때 갑옷도 입지 않은 맨몸으로 맞서 싸워 물리쳤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영화 속 모습이 아주 허구는 아닌 것 같다.

     

    이병헌의 연기가 압권이다.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쓰겠다고 나설 때, 그가 보여주는 비루함과 고뇌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상헌은 우뚝하고, 신은 비루하며, 상헌은 충직하고, 신은 불민한 줄 아오나! 오늘 신을 죽이더라도 신의 문서를 칸에게 보내시옵소서." 이 대사를 할 때 최명길이 느끼는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김윤석도 마찬가지다. 김상헌의 강직함과 동시에 인간적인 고뇌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배우 송영창은 김류 역을 통해 꽉 막힌 꼰대가 권력을 쥐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놀랍도록 훌륭한 연기를 보여줬다. 특히 송영창의 동공이 열일했다는 점에서는 영화를 본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조우진이 연기한 매국노 정명수는 조선 사회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낸다. 그의 조선 사회에 대한 적대감조차도 우리가 보기에 너무 당연해서 답답함을 느끼게 만든다.

     

    웰메이드 사극

    총 11개 장으로 영화를 나누어 각 장면 간 전환을 자연스럽게 했고, 그러면서도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은 점이 좋았다. 『군함도』와 똑같이 아픈 역사를 다뤘지만 표현 방식은 천지 차이다. 몇 개월 전 『군함도』를 봐버린 눈을 정화할 수 있는 웰메이드 사극 영화다. 더불어 소설이 원작이기에 소설과 실제 역사가 어떤 점들이 다른지 찾아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것이며 거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훌륭했지만 항상 찬란하지만은 않았던, 아픈 우리 역사도 바로 알게 된다면 좋겠다.

     

    『남한산성』은 한국에서 보기 힘든 차가운 영화다. 충무로도 할리우드와 일본처럼 이런 작품이 많이 나와야 하겠지만 아쉽게도 이 영화의 흥행을 보니 많이 힘들 것 같다. 어쩌면 이런 점이 이 영화가 더 가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자체도 어렵지 않고 단순하며 결말이야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과 그 당시의 상황을 한번 연관 지어 생각해보고 내가 저 당시 왕이었으면 최명길과 김상헌 중 어느 신하의 말을 따랐을까 생각하면서 영화를 본다면 훨씬 더 재밌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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