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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 - 괴물 (2023)취미/영화 2025. 12. 29. 19:16

괴물은 누구인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은 한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세 가지의 관점을 보여주며 진행된다. 싱글맘 사오리는 아들 미나토의 행동이 이상해진 걸 느낀다. 귀가 시간이 늦어지고 자꾸 다친 채로 돌아온다. 학교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사오리는 담임교사 호리와 교장 후시미를 만난다. 하지만 학교는 무책임한 사과만 늘어놓을 뿐이다. 사오리는 왕따를 당하는 요리를 만나면서 요리와 미나토 사이에 뭔가 사연이 있다고 느껴 아들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이번에도 또 한 번 가족과 사회의 부조리를 파고들었다. 『괴물』은 사회를 향한 냉철한 시선과 따뜻한 인류애를 동시에 보여주는 영화라고 느꼈다. 그가 계속해서 던지는 질문은 "괴물은 누구인가"다. 여러 인물의 시선을 교차시키며 진짜 괴물의 정체를 궁금하게 만든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듯 전개되는 이야기는 미스터리 장르에 버금가는 긴장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극의 끝에 가면 괴물의 정체를 공개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지금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가 괴물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다.
세 개의 거짓말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 중에서도 독특한 구조를 가졌다. 동일한 사건을 서로 다른 시각에서 세 번 되풀이한다. 1부는 어머니 사오리의 시각, 2부는 선생님 호리의 시각, 3부는 미나토의 시선이다. 이런 형식을 보면 자동으로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이 떠오른다. 하지만 『라쇼몽』은 진실을 알 수 없다는 인식론적 문제를 탐구한다. 어떤 진술이 맞고 어떤 게 틀린지 명확히 말할 수 없다. 인간은 과연 진실을 파악할 능력이 있는가를 묻는다. 『괴물』은 다르다. 명백하게 정답이 있다. 엄마의 시선과 선생님의 시선은 틀렸다. 세 번째 미나토의 시선이 옳다.
왜 굳이 이런 방식을 썼을까. 처음부터 진실을 풀어가면 안 되는 걸까. 하지만 이 구조 자체가 영화가 하고 싶은 말의 핵심이다. 형식적으로 탁월하면서 윤리적으로도 옳다. 영화의 핵심은 두 아이의 절실한 사랑이 세상의 뒤틀린 시각과 편견 때문에 어떻게 왜곡되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이 모든 통념과 편견으로부터 관객도 예외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해를 경유해서 이해에 도달한다. 이해에 도달하려면 오해를 거쳐야 한다. 두 아이를 사랑하고 책임지려 했던 엄마와 선생님조차 끝까지 두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관객은 엄마와 선생님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오해하는 과정을 필연적으로 겪는다. 관객을 의도적으로 오도한다. 이 과정 속에서 관객은 1부와 2부를 보며 누가 괴물일까 생각한다.
가족이라는 폭력
1부는 사오리의 시각에서 보여준다. 사오리는 아들을 사랑하는 성실한 싱글맘이다. 하지만 계속 잘못된 시선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오히려 상처를 주기도 한다. 그녀는 아침에 출근하며 도시락을 주면서 교통사고를 조심하라고 말을 하는데 인도와 차도가 잘 구분되지 않는 곳이라 "흰 선 바깥으로 넘어가면 지옥이야"라고 농담처럼 말한다. 차도와 인도를 구분하는 흰 선 안쪽에만 머물도록 아이를 유도하는 것은 그녀의 삶 전반과도 닮아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교통사고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지만 실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가에 대한 엄마의 통념이 담겨 있다고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미나토가 차에서 뛰어내려 병원에 갔다 온다. 엄마는 밖에서 아이를 퇴원시키며 위로하는데, 장난기가 있는 엄마라서 걷다가 흰 선을 벗어나는 자신의 걸음을 알아차리고 "아 나 지옥에 떨어졌네"라고 말한다. 아이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모르면서도 툭툭 던진 말이 아이에게 상처를 준다. 차 안에서 겪은 일이 결정적이다. 아이에게 잘해주고 싶어서 "나는 너에게 바라는 게 없어"라고 말한다. "너는 그냥 커서 좋은 가정을 꾸리기만 하면 돼. 보통 사람들이 다 이루는 평범한 가정을 꾸려서 아이를 낳고 살면 그것으로 엄마는 더 바랄 게 없고 그때까지 너를 지켜줄게"라는 사랑의 말을 한다. 하지만 미나토는 "보통 가정"을 만들 수 없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것 때문에 상처받고 차에서 뛰어내린다.
학습된 편견
2부는 같은 사건을 호리 선생님의 시선으로 보여준다. 호리는 학생들을 사랑하는 다정한 선생님이다. 밤거리를 연인과 걷다가 학생들에게 놀림받는데, 놀림받는 것보다 아이들이 제대로 귀가했을지 더 걱정한다. 아침에 아이들이 놀리는 과정에서 신발이 벗겨진 요리의 신발을 직접 가져다 신겨준다. 좋은 선생님처럼 보인다. 하지만 호리 역시 1부의 사오리처럼 두 아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상처를 줬다.
호리는 편모 슬하에서 자란 듯하다. 극중에서 그렇게 암시된다. 본인이 싱글맘 밑에서 자라며 사회로부터 편견의 시선을 받았는데도, 아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본인도 그 편견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한다. 싱글맘인 사오리가 미나토가 선생님으로부터 폭력을 당한다고 항의하러 왔을 때 "당신 가정이 편모 가정이지 않습니까, 싱글맘 가정이라서 이런 일이 흔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해서 엄마에게 상처를 준다. 본인이 편견 속에서 자랐기에 그 통념을 내면화했다. 극중에는 그런 인물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요리다. 요리는 괴물이 아닌데도 자신을 끊임없이 괴물 취급하는 아버지와 학교 아이들 때문에 스스로를 괴물이라고 자학한다. 호리가 보이는 행동, 자기도 당했던 걸 똑같은 논리로 다른 사람에게 사용한다는 점이 요리가 당하는 아픔과 겹친다.
재생을 꿈꾸는 아이들
3부는 미나토와 요리의 관계를 비춘다. 둘이 처음 만난 계기, 함께 보낸 시간, 그들만의 아지트가 밝혀진다. 둘만의 규칙과 비밀, 미나토가 요리를 때린 진짜 이유 등 전에는 알지 못했던 진실이 드러난다. 우정과 사랑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관계가 밝혀지면서 "괴물이 정말 있기는 한 걸까"라는 질문을 던지게끔 유도한다. 결국 『괴물』이 말하는 괴물은 특정 인물이 아니라 사회의 편협한 시선, 그리고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 행동을 일삼는 인간의 특성이다. 미나토와 요리는 그들의 관계를 누구에게도 떳떳이 드러내지 못한다. 부모에게도, 교사에게도, 친구에게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괴물』은 묘한 영화다. 일방적인 입장을 보며 특정 인물을 나쁘다고 욕했다가 그 인물의 이야기가 펼쳐지면 "알고 보니 착한 사람이었네" 하며 시선을 바꾸는 우리는 방관자이자 괴물이다. 각자의 시점에서 상황을 짜깁기해 누군가를 재단하는 우리는 괴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작품답게 희망을 놓지 않는다. 괴물이 될 수도, 괴물을 만들 수도 있는 사회지만 태풍이 걷히면 희망적인 날들이 올 거라는 메시지로 마무리된다.
불과 물
영화는 불로 시작해 물로 끝난다. 걸스바가 있는 고층 건물에 화재가 나며 시작하고,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치며 끝난다. 인간이 일으킨 화재로 시작해 자연이 그걸 씻어내며 마무리된다. 영화 시작은 영화 끝이 소멸시키고 되돌리는 과정이다. 처음 불이 났을 때 사오리와 미나토는 멀리 아파트 베란다에서 심드렁하게 본다. 불구경을 한다. 하지만 끝부분에서는 폭풍우 속에서 둘 다 절박하게 다른 행동을 한다. 인물의 위치나 행동조차 처음과 끝이 정확하게 대조되며 강한 감정적 파장을 만든다.
영화는 프롤로그가 있다. 1부가 시작되기 전, 제목이 나오기 전에 호숫가에서 한 아이를 짧게 보여준다. 다리만 먼저 보여주고 하반신만 보여준다. 어둑한 호숫가에서 멀리 있는 건물에 화재가 나는 걸 바라보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관객은 이 아이가 누군지 모른다. 얼굴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에 대한 설명도 없이 상태만 보여준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고층 건물에 불이 나는 걸 보여주고 불티가 하늘로 올라가는 가운데 옆에 제목이 뜬다. 괴물.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불을 지른 건 요리였다. 불 타는 건물을 보여주며 옆에 괴물이라는 제목이 뜬다. 불을 지른 사람이 괴물이라는 얘기다. 요리가 괴물일까. 그런 질문을 던지며 영화가 시작한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영화 마지막 장면을 두고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라스트 신이 정말 일어난 일이라고 볼 수도 있고, 일종의 판타지처럼 실제로 발생하지 않은 일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인터뷰에서 밝혔다. 미나토 역을 맡은 아역 배우가 꿈을 꿨다고. 꿈속에서 미나토와 요리가 죽는 꿈이었다. 그 얘기를 편지에 담아 감독에게 전했고, 고레에다 감독은 두 아이를 불러 말했다. 두 아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죽은 게 아니니까 마음껏 신나게 기뻐하는 방식으로 연기해도 된다고. 감독의 의도는 마지막 장면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감독이 그렇게 말해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만든 사람의 의도와 무관하게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영화의 뉘앙스나 흐름으로 봤을 때 일어나지 않은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감독도 말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며 사람들이 아이들의 사랑을 축복하는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건지, 여전히 세상은 바뀐 게 없고 두 아이만 행복한 건데 과연 후련하게 끝내도 되는 건지 의문을 남기고 싶었다고. 정말 중요한 건 이 엔딩이 실제로 일어난 일이냐 아니냐, 해피 엔딩인지 새드 엔딩인지가 아니다. 훨씬 더 중요한 건 두 아이가 지금 느끼는 해방감이다. 더 중요한 건 그 해방감에 어른들은 동참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영화 마지막에 이르면 1부와 2부 끝에서 엄마와 선생님은 필사적으로 폭풍우 속에서 아이를 찾지만 만나지 못한다. 폭풍우가 다 끝나면 두 아이는 긴 통로 같은 하수구를 지나 바깥으로 나와 밝은 햇살 속에서 웃으며 뛰어다닌다. 긴 통로를 지나 온몸에 진흙이 묻은 채로 바깥 햇살로 나온다는 설정 자체가 산도를 지나 아이가 재생하는 걸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더군다나 두 아이는 이대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대로는 자기들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세상으로부터 편견을 주입받았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재생을 바라고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 그 재생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통로를 빠져나와 햇살 속으로 나왔을 때 두 아이가 나누는 대화가 가장 중요하다.
요리가 묻는다. "우리는 지금 다시 태어난 걸까?" 분명히 다시 태어난 것 같은 시각적 장면을 보여줬는데도 미나토는 그걸 부정한다.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이전하고 똑같은 거 같은데." 거기에 요리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대사를 말한다. "아, 정말이야? 다행이다." 이전의 요리라면 "정말이야? 다행이다"가 아니다. 본인은 재생해야만 제대로 살 수 있는 아이였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지금 그대로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스스로를 느낀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생하지 않아도 이대로 행복할 수 있고, 지금 이대로 두 사람이 충만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감정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영화 엔딩은 무척 감동적이면서도 관객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든다. 수많은 오해를 거쳐 마침내 두 아이의 관계를 이해하게 되고, 어두운 밤에 시작해 마지막 폭풍우까지 몰아치다가 밝은 대낮 햇살 속에서 두 아이가 뛰어다니는 순간을 보게 되면서 거기에 대한 증인으로 관객이 동참하게 만드는 과정을 통해 영화는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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