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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진영 - 치치새가 사는 숲
    책/독서 2026. 2. 26. 08:46

     

     

    들어가며

    장진영 작가의 장편소설 『치치새가 사는 숲』. 친구가 재미있게 읽었다며 권해서 그 날 바로 이북으로 구매해서 읽기 시작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였고 그날 두어번 정도에 나누어서 다 읽으려고 했지만 중반부터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그루밍 성범죄를 다룬 소설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소 디테일하고 과감한 묘사보다도 화자의 태도, 행동, 감정이 나에게 자꾸만 질문을 하게 만들었다. 

     

    범죄? 사랑?

    차장이 성범죄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성인 남성이 미성년 여학생에게 접근하고, 이름을 지어주고, 특별한 존재인 척 행동한다. 교과서적인 그루밍이다. 그런데 주인공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느꼈다. 차장이 재판을 받게 되자 처벌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러브장을 증거로 내놓기까지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편지가 오히려 법적 처벌의 근거가 됐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안타깝고 답답한 장면이면서 동시에 그 감정 자체를 틀렸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에게 그것은 진짜였으니까.

     

    법이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성숙함 때문이다. 판단력이 완성되지 않았고 감정을 제대로 해석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전제이며 합리적인 논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꾸 다른 질문이 따라왔다. 그러면 스무 살이 되는 순간 사람은 바로 성숙해지나? 서른이 넘은 성인도 잘못된 관계에 빠지고 착취당하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나이가 감정을 논리적으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나'가 열네 살이었기 때문에 그 감정이 무효가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 감정은 진짜였지만 차장의 행위가 범죄인 것인지. 이 둘은 사실 별개의 문제인데 이 소설은 그것을 뒤섞어 놓았다.

     

    사랑을 몰랐던 이유

    '나'가 차장의 관심을 사랑으로 받아들인 건 단순히 어려서가 아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모는 자식들 몰래 소고기를 구워 먹는 사람들이었고,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했다. 집도 학교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고, 그 어디에서도 자신을 온전히 받아들여준 사람이 없었던 아이에게 처음으로 이름을 지어주고 특별하게 대해준 사람이 생겼으니, 그 감정이 어떻게 자랐을지는 짐작이 간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 이름 '치치림'은 김밥천국 메뉴판의 '꽁치 김치 조림'에서 따온 것이었다. 차장에게 '나'는 그 정도의 존재였는데, '나'는 그 이름을 자신이 사랑받았다는 증거로 간직했다. 이 장면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으로 착각하기 쉽고, 그 착각이 깨지는 순간 자신이 존재했다는 근거까지 함께 무너진다. 그게 '나'의 잘못이라고 말하기엔, 그 잘못을 만들어낸 건 결국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어른들이었다.

     

    진짜 가해자는 누구인가

    소설을 읽으면서 차장보다 언니가 더 큰 가해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다. 차장은 적어도 '나'에게 관심을 줬다. 그것이 계산된 접근이었다 해도, '나'의 입장에서는 생애 처음으로 받아본 온기였다. 반면 언니는 '나'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 자리를 한 번도 제대로 채운 적이 없었다.

     

    언니가 차장을 고발한 것도 결국 '나'를 위한 행동이 아니었다. 부모가 집을 날릴 위기에 처하자 차장에게 합의금 4천만 원을 받아 그 집을 지켜냈다. '나'의 피해가 언니에게는 협상의 수단이었던 셈이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소비된다는 것이 차장에게 당한 것보다 오히려 더 서늘하게 느껴졌다. 차장은 처음부터 타인이었지만, 언니는 가족이었으니까. '나'가 그토록 애정에 목말랐던 이유가, 집 안에서도 이미 충분히 설명이 됐다.

     

    마치며

    치치새가 사는 숲은 읽는 내내 마음 속에서 걸리는 것이 많은 소설이다. 차장을 단죄하고 나면 언니가 걸리고, 언니를 탓하고 나면 부모가 걸리고, 부모를 탓하고 나면 그 부모를 만들어낸 사회가 걸린다. '나'의 감정을 틀렸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받지 못한 채 자란 아이의 전부를 부정하는 것 같아서 입이 쉽게 열리지 않는다. 아무 정보 없이 펼쳤다가 그날 다 읽게 만든 책이었는데,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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