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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미유 리키에 - 베르그손 고고학
    책/독서 2025. 12. 29. 19:53

     

    토대가 아니라 흐름 속으로

    카미유 리키에의 『베르그송 고고학: 시간과 형이상학』은 장뤽 마리옹 지도 하에 쓰인 박사논문을 바탕으로 하는 앙리 베르그송 철학을 깊이 파고든 연구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베르그송의 편지, 미간행 원고, 소장 도서의 여백 메모까지 샅샅이 뒤지며 그의 사유를 추적해 나간다. 부제가 '시간과 방법'에서 '시간과 형이상학'으로 바뀌었는데 저자가 보기에 베르그송 철학의 핵심은 형이상학을 근본부터 개조하는 데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베르그송의 방법론을 집중 조명한다. 형이상학을 어떻게 심층적으로 개혁하는지, 그의 저작들에서 일관성을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2부는 베르그송이 제기한 여러 복잡한 문제들을 통해 작업 전체의 통일성을 잡아낸다. 저자는 베르그송 철학이 전통과 단절하는 방식이 아니며 데카르트부터 이어진 프랑스 철학사 안에서 형이상학을 갱신하고 복권시키는 작업이라고 보고 있다.

     

    베르그송에게 고고학은 시간의 깊이를 따라 지층을 연구하는 일이다. 그의 모든 저작은 시간 질문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부터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까지, 각 저작은 과거, 현재, 미래, 영원 같은 시간의 차원들과 감각, 기억, 의지, 사랑 같은 지속의 층들을 차례로 전개한다. 베르그송의 고고학은 이 시간적 지층들의 유동성 속에 머문다. 그의 철학적 탐구는 경험의 깊이 속으로 녹아든다.

     

    확고함에서 용해로

    이 책은 깊이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리키에는 베르그송이 전통 형이상학이 추구하고 있는 단단한 토대를 찾는 행위 자체를 비판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딛고 선 지반이 사실 무르다는 걸 밝히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반 아래로 우리를 데려가 모호하고 시간적인 변화들을 목격하게 만든다. 베르그송 철학은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않는다. 경험을 따라 내려가며 점진적으로 깊어지면서 순수지속에 가까이 다가간다. 정초하지 않고 용해된다. 땅이 꺼지는 걸 마다하지 않고 확신을 주는 대신 흔들릴 위험을 택한다.

     

    베르그송은 데카르트를 계승하면서도 핵심을 뒤집는 연구를 해왔다. 데카르트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토대 위에 지식을 세우려 했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앞서 말했듯 이런 단단한 토대 이미지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철학은 이제 정초하지 않고 흐르는 시간 속으로 스스로를 녹인다. 이게 베르그송 철학이 전통 철학과 다른 점이다.

     

    1부는 베르그송 작업의 근간이 되는 방법의 세밀한 절차를 다루고 있다. 발표되지 않은 저작, 편지,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들이 베르그송이 어떤 과정을 거쳐 결과에 도달하는지 세세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베르그송이 지속을 사유하라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형이상학의 고전적 문제들을 "지속 안에서 사유하기"를 제안한다고 본다. 이건 형이상학 전체를 개혁하자는 요구라고 볼 수도 있다.

     

    허약한 직관을 단련하기

    베르그송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이 자아의 본질을 꿰뚫는다는 직관적 방법을 알아야 한다. 베르그송은 직관적 방법으로 형이상학 자체를 개혁하려 했다. 형이상학의 지위를 완전히 바꿔 학설 전체에 영향을 끼쳤다. 베르그송에게 방법이란 과학적 지성으로 허약한 직관을 정교하게 만들고 경직된 지성을 예술적 직관의 깊이로 데려가는 일련의 노력이었다. 이와 같은 방법은 베르그송 저작뿐 아니라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저자는 베르그송에 대한 오해 대부분이 그의 방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직관이 베르그송의 방법이라는 통념은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질 들뢰즈는 『베르그송주의』에서 직관이 베르그송의 방법이라고 주장했지만 리키에는 이게 부정확하다고 본다. 만약 직관이 방법이라면 베르그송이 이미 직관을 완벽하게 장악했다는 뜻이 된다. 하지만 베르그송은 직관을 매우 약하고 결함투성이인 능력으로 봤다. 엄청난 노력이 필요한 능력이다. 직관에는 인내가 요구된다. 전통 형이상학이 완전히 믿을 수 있는 최고 능력 위에 지식을 쌓으려 했다면 베르그송은 정반대로 간다. 가장 미발달하고 가장 약하고 가장 더듬거리는 능력에서 출발한다. 이 직관을 단련하는 작업을 통해 철학은 단순히 우리 상태를 파악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것을 연장하고 키운다. 철학적 노력은 깊이 창조적이며 세계와 공감하는 능력을 넓힌다.

     

    중요한 건 직관이 지성에 맞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리키에가 강하게 강조하듯 지성의 모든 작업, 특히 과학의 작업이 있어야 세계를 움직이는 것으로 다시 파악할 수 있다. 게다가 지속의 직관은 기하학적 공간의 지성에 반대해서 얻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후자가 필요해야 전자에 닿는다. 따라서 베르그송이 지속과 공간을 대립시킨다고 믿는 건 오해다. 사실 지속은 공간화하는 지성이 작업을 끝마쳤을 때만 다시 파악된다. 실천적 경향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반대 경향, 즉 움직이는 것을 다시 파악하는 경향이 풀려난다. 따라서 철학자는 과학 없이 갈 수 없다.

     

    과학과 손잡기

    더 넓게 보면 베르그송은 형이상학과 과학을 대립시키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마치 형이상학이 과학보다 우월한 것처럼 보는 걸 거부한다는 뜻이다. 철학자는 오히려 과학과 형이상학이 서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형이상학 연구가 과학이 눈치채지 못한 편견과 경직된 사고 틀을 어떻게 없애도록 도울 수 있는지 탐구한다. 반면 과학이 철학에 주는 도움은 철학을 사실들과 마주하게 하고 그렇게 직관 작업을 준비하는 것이다. 지속을 사유하면서 철학은 결국 과학에게 그 몫을 돌려준다.

     

    베르그송이 데카르트를 이으면서도 변형하려는 의지는 과학의 발전만큼이나 지속이라는 철학적 직관에서 나온다. 형이상학 과제에 대한 이 재구성은 그 지위 자체를 건드린다. 리키에가 보기에 베르그송은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확립된 철학 전통과 달리 더 이상 형이상학을 제일철학으로 여기지 않는다. 철학의 나무를 세우려 하지 않는다.

     

    시간의 여러 층

    방법을 다룬 1부 이후 리키에는 베르그송의 시간 형이상학을 분석한다. 이를 위해 베르그송의 네 주요 저작 순서를 따른다. 『의식의 직접소여에 관한 시론』, 『물질과 기억』, 『창조적 진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질 들뢰즈, 앙리 구이에, 프레데릭 보름스 같은 많은 주석가가 이렇게 진행했다. 베르그송 사유의 생성, 진화, 긴장, 심지어 모순까지 설명하려 한다.

     

    베르그송 저작들의 통일성과 일관성 문제는 핵심적이면서도 까다로운 질문이다. 저자가 단 하나의 직관을 발전시켰을까. 하지만 그렇다면 베르그송이 말하듯 문제들이 미리 주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다시 제기되고 설정돼야 한다는 걸 어떻게 설명할까. 다음 단계를 예단하지 않고 말이다. 반대로 베르그송 작업에 통일성이 없다면 테제와 사유의 분산은 어디까지 갈까.

     

    시간 개념이 리키에로 하여금 베르그송의 걸음을 통일된 방식으로 설명하게 한다. 『시론』에서는 현재가 중심이다. 자유의 존재를 증명할 때다. 『물질과 기억』에서는 과거가 중심이다. 뇌가 우리 기억과 함께 표상이 아니라 행동을 준비한다는 걸 보여줄 때다. 『창조적 진화』에서는 미래가 중심이다. 자연 인과성 이해를 다시 세울 때다. 마지막으로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는 영원이 중심이다. 신비주의 활동과 인류의 생명적 재생을 다룰 때다. 이 틀이 도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마치 베르그송이 책마다 시간의 다른 모습들을 차례로 연구하기로 작정한 것처럼. 리키에가 주장하는 건 그게 아니다. 그는 이 시간 질문을 써서 철학자에게 작동하는 연속성을 보여주고, 점점 더 깊고 점점 더 넓은 지속의 층들을 포괄하며 확장되는 질문을 보여준다. 리키에는 원뿔 형상의 다양한 변형들을 써서 베르그송 사유의 구조를 도식적으로 그려낸다.

     

    인격이라는 문제

    베르그송 사유는 결국 저자 스스로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긴 문제, 인격 문제에서 정점에 닿는다. 리키에는 베르그송 이해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강연들, 1914년 에든버러에서 한 기포드 강연들에 기댄다. 이 강연들은 인격 문제를 다룬다. 플로티노스에서 출발해 베르그송은 이 개념 이해가 기본 노선에서 거의 발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철학자들은 우리 인격을 더 근본적인 실재에, 그것의 동일성과 연속성을 보장할 실체적 핵으로 고정시키려 했다. 칸트가 가능한 경험 속에서 인격을 정초할 수단을 찾지 못해 합리적 심리학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한 것도 그래서다. 초월적 주체는 결국 경험적 방식 외에는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결론 부분 제목은 '모든 상태 속의 인격'인데 표현의 의미를 가지고 논다. 인격은 엄밀히 그 상태들과 연대돼 있어서 그 모두 속에서 자신을 되찾는다. 인격을 그것의 연속적인 여러 상태들과 실제로 구별하는 건 불가능하다. 인격이 끊임없이 시험받고 불안정하다면, 인격성은 영구적으로 유지돼야 할 노력이다. 이 노력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을 때 인격의 여러 병리가 나타난다. 베르그송은 두 큰 범주를 구분한다. 의지의 병리는 무감동을, 기억의 병리는 실어증을 낳는다. 행동 장애, 기억 장애. 광기는 그래서 인격에게 영구적 위험이다.

     

    신비주의와 함께, 그것은 철학의 연장이고 철학이 아마 멈춰야 하는 문턱인데, 베르그송 사유가 그 정점을 찾는다.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에서 베르그송에게 던져진 질문은 인류의 미래다. 기술 진보에 짓눌린 인간의 허무주의냐, 생명적이고 정신적인 재생이냐. 하지만 신비적 에너지로 인격성이 확장되는 것, 즉 신비 체험 그 자체는 아마 철학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것은 생명 약동 사유의 다음 단계 같은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말할 수 있을까.

     

    가장 단순한 질문들로

    이렇게 이 여정 끝에서 리키에는 모두가 던지는 단순하고 소박한 질문들을 되찾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들이 베르그송에게 핵심적인 건 인격성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은 단순히 존재의 토픽을 옮긴 게 아니다. 실체에서 지속으로 이동하며 움직이는 것의 존재론을 제안한 게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인격성을 위한 새로운 중력 중심을 찾았다. 더 이상 토대가 아니고,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바탕이 아니라 반대로 힘의 중심, 행동의 중심이면서 잠재적으로 우주 전체와 공감하는 중심.

     

    지속 속으로 침투하려는 노력은 지속의 언어를 만들려는 노력과 함께 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인격성을 키우려는 노력을 뒷받침한다. 이것이 깊이 베르그송 텍스트를 파고드는 매우 풍부한 연구다. 베르그송 연구에 필수적인 책이며, 지난 10여 년간 베르그송 연구의 활력과 오늘날 기쁨과 창조의 철학이 갖는 중요성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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