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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리 매튜스 - 시가렛
    책/독서 2025. 12. 29. 20:13

     

    관계의 퍼즐

    해리 매튜스의 『시가렛』은 1987년에 나온 네 번째 소설이다.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시가렛』은 표면적으로 사실주의 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읽어봐도 1인칭 화자가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시간선이 뒤죽박죽인 소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겉모습만 사실주의의 옷을 입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매튜스는 당시 이 소설을 자신의 첫 진정한 울리포 소설이라고 불렀다. 다만 사건의 순서에 제약을 두었다고 했을 뿐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밝힌 바가 없다. 매튜스는 원래 자신이 정해둔 제약 사항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는 작가이기도 하다. (*울리포 소설: 형식적인 제약을 스스로 부과하여 창의적인 글쓰기를 탐구하는 소설)

     

    울리포 소설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어도 책을 읽다 보면 어떤 부분에 제약을 두었는지 나름대로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가렛』은 총 15개의 챕터로 되어있고 각 챕터당 13명의 주요 인물 중 두 명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이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어떤 규칙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물론 제약은 인물 수나 챕터 수와 전혀 관계 없을 수도 있다. 소설 내에는 모든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큰 줄거리가 없지만 각각의 이야기가 완전히 따로 분리되는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몇 개의 다른 이야기들과는 연결된다고 보였다.

     

    소설 첫 페이지에는 "나"라는 화자가 나타난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는 읽었다"라고 말하며 이야기의 서술자임을 밝히며 "나는 이해하고 싶었다. 언젠가 이 사람들에 관한 책을 쓸 계획이었다. 나는 전체 이야기를 원했다." 라는 말을 하고 난 뒤 서술자는 사라진다. 이후 전지적 시점으로 바뀌면서 처음 등장하는 "나"를 잊게 된다.

     

    사랑과 권력

    소설 내부의 시간은 1936~38년과 1962~63년 사이를 오간다. 대부분 챕터는 62년 말과 63년 초에 집중되어 있다. 몇 개는 30년대부터 60년대까지 기간 전체를 다루기도 한다. 특별한 순서나 논리 없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인다. 종종 나중 챕터가 앞선 챕터에서 빠진 내용을 채워준다. 때로는 아주 작은 실 하나가 한 챕터를 다른 챕터로, 한 인물을 다른 인물로 연결한다. 바로 이 연결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시가렛』을 읽는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모든 관계와 연결과 이야기와 사건들을 퍼즐처럼 맞추는 것이다. 매튜스는 독자에게 일을 시키는 작가이기도 하다. 모든 게 쉽게 소비할 수 있도록 잘 차려져 나오거나 떠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정도는 능동적인 독자로서 각오해야 할 부분이다.

     

    소설은 전체적으로 14가지의 관계를 통해 사랑과 권력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남매, 자매, 연인들(이성애와 동성애), 남편과 아내, 친밀한 우정까지 관계의 종류도 다양하다. 이야기의 주요 주제는 예술계이며 사랑과 섹스. 경마, 수상한 사업 거래,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의 초상화 같은 특정 요소들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이 초상화는 이야기들을 여행하며 거의 모든 인물을 건드린다. 

     

    소설의 끝이 다 되어서야 서술자가 돌아온다.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키고 우리가 그의 정체를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말하지 않지만 꽤 분명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은 죽음에 관한 아름다운 구절로 끝난다. "죽은 자들은 우리 사이에 영원히 현존한다.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 하듯 그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일 때만 사라지는 만질 수 있는 공백의 형태로. 우리는 죽은 자들을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그들의 공백을 우리 자신의 본질로 채운다. 우리는 그들이 된다."

     

    언어와 행동

    매튜스에게 있어 언어라는 것은 인간 행동 중 소통을 반영하는 도구이다. 언어와 행동은 방대한 가능성을 가진 상호 연결된 영역이다. 둘 다 창조적으로 실행되며 받은 정보에 대한 반응으로 수행될 수 있다. 이 과정은 파괴적인 행동으로 이끌게 된다. "가장 좋아하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 소유욕, 자신을 돌봐준 형제자매를 향한 분노, 잘못된 방향의 자기 연민 같은 것들. 이것들을 깨뜨리려면 극단적 조치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매튜스의 인물들이 그 조건화를 깨뜨리는 방법들이 있다. 사도마조히즘 게임이 있다. 어떻게든 감동적이고 웃기게 나온다.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질병도 있다. 질병은 특히 폭력적인 형태의 파괴다. 그리고 더 전통적인 스승과 제자 관계가 있다. 두 작가 사이처럼. "모리스는 그에게 글쓰기가 할 수 있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창조가 전형적인 형태와 절차를 소멸시킴으로써 시작한다는 개념을 제시했다. 특히 연속과 일관성의 환상적인 자연스러움을." 하지만 습관을 바꾸는 건 단지 패턴을 없애는 것만이 아니다.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이 가까이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쁨과 고통

    『시가렛』에서 삶은 황홀과 갈망과 고통의 능력이 무한한 일종의 연극이다. 그것에 참여하는 건 아프게 기쁜 것으로 드러날 수 있다.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수필가인 해리 매튜스는 문학의 위대한 현대 보물 중 하나다. 그의 작업을 특징짓는 능숙한 실험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울리포와의 관계 덕분이다. 울리포는 규칙을 텍스트에 적용해 문학의 잠재력을 탐구하는 데 헌신하는 프랑스 작가들과 수학자들의 그룹이다. 논리적 단계들의 연속이 놀라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놀라움은 프랑스 정신분석가 자크 라캉이 지적했듯이 아마도 우리 무의식의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다.

     

    이 우아한 책은 사악하면서도 따뜻하다. 유머, 구조의 헤라클레스적 비계, 화려한 묘사, 세밀한 서술, 대화. 직접적인 대화는 자연스러운 것부터 기괴하게 진부한 것, 무섭게 이해할 수 없는 것까지 다양하다. 예술가가 조수에게 "넌 캔버스 위에 똥을 싸고 있어. 넌 더 잘 알잖아"라고 말하는 대사부터 경마장 베팅을 논의하는 여자가 구애하는 남자에게 "틀린 별명이야 자기. 요점은 지금까지 내 시스템은 처녀의 기도에 대한 답이 아니라는 거야"라고 말하는 진부한 대사도 있다. 진단되지 않은 질병으로 쇠약해진 젊은 예술가의 "그러면 샐러드 날들을 위한 멋진 나이 든 양상추 조각이 제안들과 척추 장식들로 가득 차 있어"라는 대사도 있다.

     

    매튜스는 이 정교한 도식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추상적 상황들이 A가 B를 만나고 B가 C를 만나는 식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지금 그걸 찾을 필요는 없다. 그 자신을 포함해 아무도 알아낼 수 없을 테니까. 어쨌든 그는 1년 동안 이걸 들여다봤고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다음 상황들이, 그다음 이야기들이 나타났다. 흥미로운 소설이다. 속임수처럼 사실주의적이고 심리적이지만 끝에는 아마도 거의 보이지 않는 서술자에 의해 색깔이 입혀 마무리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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