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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이북으로 구매해서 읽었다.
들어가며
이승우의 작품에는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이곳에서 저곳을 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 『캉탕』도 예외가 아니다. 주인공 한중수는 친구이자 정신과 의사 J에게 되도록 아무런 연고도 없는 먼 곳으로 떠나보라는 조언을 받는다. 이따금씩 머릿속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 때문이다. 어느날 이 사이렌 소리가 커져 발표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지독한 두통과 과도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자 J는 주소가 적힌 쪽지 하나를 건넨다. 그곳이 캉탕이다. 『캉탕』에 대한 내 첫 인상은 모비딕과 세이렌 이야기의 현대식 번역을 통해 시간과 죄에 대해 탐구한 책이라는 느낌이었다.
세상의 끝이자 시작
캉탕은 웬만한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대서양의 작은 항구도시다. 그곳 사람들은 캉탕을 '세상의 끝'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끝은 곧 시작과 다름이 없다. 즉, 세상의 끝은 동시에 세상의 시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지구가 둥글기 때문에 끝은 없다고도 할 수 있고, 동시에 어디든 끝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도 캉탕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가 바로 세상의 끝이자 시작일 수 있다. 이것이 이승우 작가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시작이라는 것. 끝은 어디든 될 수 있고, 바로 그 자리가 시작도 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질문할 차례이다. 그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인가?
세 사람의 사연
소설은 홀수 장과 짝수 장이 다른 시점으로 진행된다. 홀수 장은 전지적 작가 시점, 짝수 장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며 화자는 한중수다. 캉탕에는 세 남자가 있다. 한중수, 그리고 그보다 먼저 캉탕에 정착한 핍, 광신적 종말론을 믿다가 어쩌다 선교사가 되어 흘러들어온 타나엘. 셋은 물리적인 접점은 없으나 각자가 가진 사연은 모두 기구하며 과거와 단절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일지도 모르겠다.
셋 중 원래부터 캉탕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모두 자발적으로 찾아온 건 아니었다.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운명이라 할 수 있을 반강제적인 힘에 의해 캉탕으로 유입되었다. 인간은 결코 자발적으로 인생의 끝에 서지 않는다. 저마다 다른 어떤 이유와 저항할 수 없는 힘을 필요로 한다. 그렇게 우린 끝을 맺고 또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성장과 성숙, 멸망과 구원,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우리네 인생이 아닐까.핍 - 읽어주기를 통한 회복
가장 먼저 캉탕에 들어온 건 핍이다. 수십 년 전 고래잡이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다 풍랑을 만나 죽기 직전 간신히 닿은 육지가 캉탕이었다. 핍의 본명은 최기남이다. 그는 가난했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책을 좋아했던 그는 머슴살이를 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어느날은 책을 읽다가 자신의 삶이 지옥 같다는 판단을 하게 되어 탈출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문학소년이었던 그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고 『모비 딕』을 읽고 난 영향이었는지 고래잡이배를 타기로 한다. 그렇게 이십여 년간 바다를 떠돌다 캉탕으로 흘러들어왔다. 그곳에서 나야를 만났다. 핍은 육지에 정착할 생각은 없었으나 세이렌과 같은 나야의 노래에 이끌려 캉탕에 정착하게 된다. 과거가 되기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걷고자 했던 시인과는 다르게, 그는 적응했고 과거에 머물렀다. 캉탕은 더 이상 걷지 않는 자들의 세상인 것이다.
최기남은 나야와 결혼하여 캉탕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 최기남이 아닌 핍으로서의 인생 2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때 나야는 이미 3년 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캉탕 사람들 말로는 핍은 나야가 죽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실제로 한중수가 본 핍은 폐인과 같았다.
최기남으로 살던 시절이 인생 1막, 나야와 함께 살던 시절이 2막, 나야가 죽은 뒤 폐인의 삶이 3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핍에게 유혹자이자 구원자였던 나야의 죽음은 그를 바닥으로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이후 그는 나야가 있었던 병원을 자주 찾아가 환자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활동을 한다. 나야가 그것을 좋아했던 만큼 핍은 같은 행위를 하면서 나야를 기억했을 것이다. 책을 읽어주는 행위를 통해 그는 나야와 함께 죽었던 인생 2막으로부터 3막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타나엘 - 말하기를 통한 고백
타나엘은 과거 한 여자와 헤어지면서 삶의 이유를 잃었다. 그녀로부터 이별을 통보받던 날 마침 종말론을 외치는 종교집회가 있었고 그날은 그녀가 실종된 날이기도 했다. 그 여인을 타나엘이 죽였는지 타자에 의해 살해되었는지는 책에서 명확히 언급되는 부분은 없다. 타나엘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했다.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그날은 타나엘의 인생을 낭떠러지로 떨어뜨린 날로 각인되었다. 몇 년 후 캉탕에서 선교사 자격을 박탈당한 이유도 그날 실종되었던 옛 애인이 뒤늦게 시체로 발견되어 살인혐의를 쓰게 되었기 때문이다.
타나엘은 해임 통고를 받은 선교사가 된 후 선교 단체로부터 사유서를 제출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는 쓰려고 했으나 쓰지 못했다. 죄를 완전히 고백하는 글쓰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사실이라, 어떤 것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아서 결국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해임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 해임 통지서는 멀리에서 왔습니다. 아주 먼 과거로부터 날아왔습니다. …… 과거는 어딘가에 웅크리고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와 현재를 물어뜯는 맹수와 같습니다."
한중수가 캉탕으로 들어왔을 무렵 타나엘은 매일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과거를 정직하게 대면하기 위해, 진술서를 솔직하게 쓰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쓸 수 없었고, 써지지가 않는다고 했다. 이후 한중수의 졸도 사건을 계기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지극히 낯선 타자인 한중수에게 털어놓으면서 글이 아닌 발화된 글, 즉 말로써 쓰기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한중수 - 글쓰기를 통한 치유
한중수는 아버지의 횡포로 각박하고 치열하게 살아야만 했다. 아버지 때문에 받았던 마음의 상처는 죄책감을 포함한 여러 부정적인 감정들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중년이 되었을 무렵 예고 없이 머릿속에서 사이렌이 울리며 모든 게 정지되는 듯한 상태로 들어가는 병을 얻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을 키우는 단 한 곳, 나는 그곳을 알고 있다. 과거이다."
사이렌 소리는 어쩌면 그의 방어기제였을지도 모른다. 몸의 자발적인 방어본능으로 한중수를 죽지 않도록 먼저 쓰러뜨리는 방안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망령 때문에 몸과 마음이 망가진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J는 한중수에게 캉탕으로 가서 다음과 같이 하라고 주문한다.
'걸으면서 보고 쓸 것, 보려고 걷지 말 것, 쓸 것이 없으면 쓰지 말 것, 그저 걸을 것.'
한중수는 그 주문대로 실천에 옮긴다. 언어와 문화를 포함한 모든 것이 낯선 곳에서 그도 모르게 그의 인생 2막이 시작되고 있었다. 졸도 이후 정신과 상담을 했던 친구 J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겨왔던 과거의 이야기들을 병원 침대맡에 있던 타나엘에게 고백하게 된다. 이 덕분에 타나엘도 나중에 한중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말로 쓸 수 있게 되었다.발설을 통한 해방
핍은 읽어주기를 통해, 타나엘은 말하기를 통해, 한중수는 말하기와 글쓰기를 통해 각자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솔직하게 대면한다. 읽어주기와 말하기와 글쓰기는 모두 발설하는 행위이다. 발설을 통해 정직하게 자신의 과거를 마주한 세 남자는 비로소 과거로부터 해방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하게 된다. 어두운 과거로부터의 탈출, 죄책감으로 물든 숨겨왔던 과거의 종말, 현재의 삶까지 송두리째 갉아먹던 과거의 망령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의 끝은 곧 과거의 끝과 같다. 인생의 한 막의 종언을 선고하는 것이다. 셋은 모두 과거의 종말을 캉탕에서 맞이했던 셈이다.
절대적으로 낯설다는 것의 의미
캉탕이 철저하게 낯선 곳이라는 점, 그리고 세 남자가 서로 전혀 알지 못한다는 점. 이 두 가지 '낯섦'이 그들이 자신의 과거를 온전히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인생과 접점을 이루는 누군가에게는 비밀을 잘 공유하지 않는다. 누설될 위험과 왜곡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 타자에게는, 그리고 절대적으로 낯선 곳에서는 그것이 가능하다.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가장 낯선 곳에서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꺼낼 수 있는 것이다. 캉탕이 바로 그런 곳이었다. 안전한 글쓰기는 결국 온전한 고백이 아닐까.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마치며
책은 세 남자가 새로운 시작을 했는지 그 여부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그저 끝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이승우 작가는 캉탕이 세상의 끝이라고만 썼던 것 같다. 그렇게 끝난 곳에서 세상은 다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세상의 끝에서 쓰기(읽어주기, 말하기, 글쓰기 포함)를 통해 과거 자신의 내밀하고 은밀한 내면을 정직하게 마주하면 바로 그곳이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 된다고 믿고 싶다.
앞서 말했듯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캉탕은 세상의 끝이자 시작이다. 즉, 지금 내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캉탕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만약 내가 내 과거를 정직하게 마주하고 고백하게 되면, 바로 지금 여기가 옛사람을 끝내고 새 사람을 시작하는 곳일 수 있다. 캉탕은 절대적 낯섦의 공간이다. 정직하게 절대적 타자 앞에 선 인간은 모두 캉탕에 있는 것이다.'책 > 독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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