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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 거울 (1975)
    취미/영화 2025. 12. 17. 17:15

     

    시간의 조각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거울』은 난해하기로 유명한 영화다. 다른 작품들도 쉽지 않지만 『거울』은 특히 어렵다. 비선형적인 내러티브 구조, 생소한 배우들, 맥락 없이 삽입되는 다큐멘터리 화면, 내용 전개와 상관없어 보이는 시퀀스들이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고 어느 시간대인지도 파악할 수 없었으며, 무엇보다 이 모든 장면들이 왜 이런 순서로 배치되어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거울의 구조

    『거울』이라는 제목은 영화의 구조를 암시한다. 영화는 중간을 기준으로 데칼코마니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는데, 거울에 반사되는 것처럼 편집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가 마음대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이런 의도를 가지고 만든 것이다. 영화는 세 개의 시간대를 오간다. 1935~36년, 타르코프스키가 세 살에서 네 살이었을 때. 1943~45년, 그가 열한 살에서 열세 살이었을 때. 1969년, 그가 서른일곱 살이었을 때. 각 시간대는 같은 시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화면과 교차하며 나타난다.

     

    하지만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타르코프스키는 시간대를 자유롭게 오가고 허구적 재현과 기록 영상을 뒤섞으며 컬러와 흑백 필름을 번갈아 사용한다. 게다가 같은 배우 마르가리타 테레호바가 어린 시절 장면에서는 어머니 역할을, 현재 장면에서는 아내 역할을 맡았고, 같은 소년 배우 이그나트 다닐체프가 1940년대의 타르코프스키와 1960년대의 타르코프스키 아들 역할을 맡았다. 그렇기에 우리는 헷갈릴수밖에 없다.

     

    부재의 상실감

    이그나트와 알렉세이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함께 자랐다. 그래서 아버지의 부재가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런 상실감은 그들만의 것이 아니다. 스페인 이민자에게도 아사프예프에게도 그 상실감은 똑같다. 이런 상실감에는 전쟁이라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초기작 『이반의 어린 시절』을 보면 2차 세계대전이 어린아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는 이것이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중간에 다큐멘터리 영상을 삽입한다.

     

    전쟁의 고통에 대해서 타르코프스키는 나름대로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종교적 예술이다. 러시아 몰락의 원인이 그리스도라는 차다예프의 의견에 반박하는 푸시킨의 편지를 통해 타르코프스키는 그리스도를 찬미하며, 알렉세이 아버지가 돌아올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상화가 삽입되는 것은 예술을 찬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르코프스키는 종교적 예술에 대해 지대한 관심이 있었는데 그의 전작 『안드레이 루블료프』에서도 알 수 있다.

     

    문학과 예술에 대한 견해

    타르코프스키는 문학에 대한 견해가 뚜렷하다. 문학에는 국가적 프로파간다나 개인의 명예가 개입하면 안 되며 오직 예술적 가치만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루샤가 인쇄소에서 공산당 때문에 두려움을 떠는 장면이나 알렉세이가 나탈리아에게 요즘 문학에 대해 불평하는 부분이 그의 견해를 보여준다. 또한 엘리자베타가 마루샤에게 한 말이나 알렉세이가 나탈리아에게 한 말을 보면 타르코프스키의 유년 시절 어머니가 겪으신 주변 시선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은 그 아이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이 타르코프스키에게 매우 아프게 들렸을 것이다. 불타는 집과 나무는 종교적인 느낌이 강하다. 유작 『희생』을 보면 불타는 집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불타는 나무는 모세에게 등장한 천사를 연상시킨다. 아버지 없이 지내는 고통을 그리스도의 힘으로 극복하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꿈 장면

    전반적으로 난해한 영화이지만 꿈 부분이 가장 난해하다고 느껴졌다. 반복되는 인서트가 굉장히 많은데, 첫 번째 꿈에서는 아버지를, 두 번째 꿈에서는 어머니를 작은 목소리로 부른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찬미,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위로가 담겨 있다. 바람 부는 풀숲이 세 번이나 반복되는데, 그 끝은 어린 알렉세이가 텅 빈 집에 들어가서 우유를 마시는 모습으로 끝난다.

     

    왜 바람 부는 풀숲이 초반과 후반에 배치되었고 왜 반복되었는가. 영화 초반에 등장한 의사의 말과 연결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본성을 믿지 않기 때문에 불신하고 하찮은 말이나 하며 바삐 움직인다고 한다. 그런 반면 바람에 따라 움직이는 풀숲은 그렇지 않다. 나무와 같은 식물들처럼 자신의 본성에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삶을 동경한 것이 아닐까.

     

    말더듬이 소년

    영화는 말더듬는 습관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서 교정받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언어 장애는 언어와 사고의 분리에서 생겨나는 것이며, 타르코프스키는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시간의 공백을 하나의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질문과 대답이다. 청년 유리가 말더듬으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최면 치료로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타르코프스키는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 질문을 던진다.

     

    중반부에는 낯선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정체 불명의 남자에 대해서 죄의식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고 한다. 그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는 바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본인이다. 그에게 어떤 죄책감이 있는가. 바로 그의 여성관이다. 타르코프스키는 모성애의 결핍을 겪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영화 『솔라리스』에서도 하리를 크리스 켈빈의 어머니 대체품으로 보았고 『거울』에서도 나탈리아를 마루샤의 대체품으로 보았다. 그는 이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말을 할 수 없다.

     

    시간을 조각하는 영화

    타르코프스키는 영화의 본질적인 재료가 시간이라고 말한다. 조각가가 점토로 작업하듯 영화감독은 시간의 블록으로 작업한다. 영화감독은 필름에 각인된 시간의 블록을 포착하고 편집 과정에서 그것을 조각하며 상영을 통해 그것을 풀어낸다. 이것이 영화를 다른 예술 형식과 구별하는 것인데, 시간의 순간을 기록하고 그것을 반복하는 능력, 과거를 이미지로 현재화하는 능력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사실과 미학적 구조가 시간 내에서 존재하고 변화한다는 인식을 전달하는 힘, 정확성, 선명함에서 영화와 비교할 수 있는 다른 예술은 없다"고 말한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하는 시간은 개인적이거나 주관적이지 않다. 영화감독은 시간을 창조하지 않고 주어진 시간과 함께 작업한다. 이미지 자체에 내재된 시간 말이다. 이것이 타르코프스키에게 중요한 이유는 독창적인 예술 작품 창조에 필요한 내면으로의 전환이 예술가를 세계와 다시 연결하는 외면으로의 전환과 만나도록 보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가 이 점에서 실패하는 이유는 몽타주에 대한 집착이나 내러티브에 대한 집착을 통해 이미지에 인위적인 시간을 부과함으로써 이 객관적 차원을 희생하기 때문이다.

     

    경험으로서의 영화

    타르코프스키는 사람들이 영화관에 가는 주된 이유가 시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살아 있는 경험을 위해 그곳에 간다. 영화는 다른 어떤 예술과도 달리 사람의 경험을 넓히고 강화하고 집중시키며, 그것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훨씬 더 길게 만든다. 그것이 영화의 힘이다." 이 주장은 우리가 보통 영화의 매력에 대해 스스로에게 하는 이야기와 다르지만, 그가 이 점에서 틀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타르코프스키의 작품이 그의 사후 거의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매력이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지난 10년 동안 계속 위상이 높아진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거울』이 개봉한 지 37년 후 사이트 앤 사운드 설문조사에서 감독들이 뽑은 톱텐에 9위로 등장한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타르코프스키가 시간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영화나 다른 사람의 영화에 부여할 수 있는 의미나 중요성을 제한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간의 무상함이나 유동성은 무엇보다도 『거울』 같은 타르코프스키 영화의 각 상영이 그 자체로 독특한 사건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도 숨겨져 있지 않다

    타르코프스키는 『거울』이 자신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히려 그와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갖는 감정, 그들과 타르코프스키 사이의 관계, 그들을 위한 영원한 동정과 동감,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무력함과 그들에 대한 그치지 않는 죄의식에 관해서 이야기한 영화라고 말한다. 그는 이 서정적 감정을 이해하지 말고 말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이 불신과 실망의 혼란은 부분적으로 타르코프스키 자신의 의도적인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심지어 『거울』에서조차도 자신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지지 못하고 타협한 부분이 있다고 자기 비판한다. 그중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닭을 도살하는 장면의 의도적인 연출은 슬로모션 때문에 문학적이 되었으며, 바로 그런 점에서 배우의 얼굴 표정 대신 감독의 연출 의도만이 드러나게 되었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수많은 비평가들은 이 영화를 보고 끊임없이 감춰진 상징과 의도, 비밀을 찾아내려 했으며, 타르코프스키는 바로 그러한 태도에 실망했다고 한다. 그는 이 작품에 겉으로 드러난 것 말고 또 다른 숨겨진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반복하였으나, 오히려 비평가들의 불신과 실망만을 불러일으켰다.

     

    청소부 아주머니의 해석

    『거울』은 완성된 후 유명한 비평가 그룹에게 처음 상영되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비평가들은 숨겨진 의미를 찾고 방금 본 것을 이해하려고 하면서 논쟁을 시작했다. 계속 논쟁이 이어지다가 청소부 아주머니가 상영실에 와서 토론이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그들에게 얼마나 더 있을 거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아주 복잡한 영화에 대해 토론하고 있어서 이해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청소부 아주머니는 "이 영화에서 이해 못 할 게 뭐 있어요? 저도 봤는데 다 이해했어요"라고 말했다.

     

    비평가들은 잠시 침묵했고 그중 한 명이 그 여자에게 『거울』에 대한 생각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대답했다. "그건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들과 자기를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고통을 준 남자에 대한 이야기예요. 이제 그는 죽어가고 있고 그들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하지만 방법을 몰라요." 잠시 후 타르코프스키는 청소부 아주머니가 한 말 외에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더 할 말이 없다고 말했다.

     

    여운

    『거울』은 시다. 그런 식으로 경험해야 한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음악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타르코프스키는 『거울』의 드라마투르기가 "음악과 시의 연상적 법칙"을 따른다고 말했는데, 그 법칙들은 동시에 영화 매체와의 접촉을 통해 변형된다. 이 영화는 한 남자의 자화상이며, 우리가 절대 보지 못하는 대상은 자신을 보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는 우리를 자신의 거울로 사용하고 있다. 그를 정의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모두가 하는 일이다. 우리는 모두 세상에서 보는 우리 자신의 반영을 사용하여 우리 자신을 정의하고 심지어 창조한다.

     

    『거울』을 여러 번 보았지만 볼 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혼란스럽고 난해했지만 이제는 단순함 그 자체로 보인다. 처음에는 영화적 내러티브에 대한 일탈처럼 보였던 것이 이제는 영화 매체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유기적인 수단처럼 보인다. 움직임과 시간과 빛으로 가득 찬 이미지를 사용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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