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빔 벤더스 - 퍼펙트 데이즈 (2023)
    취미/영화 2025. 12. 15. 00:28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찾은 것

    '퍼펙트 데이즈'는 화려한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명확한 결말도 없이 그저 한 남자의 일상을 담담하게 보여줄뿐인 영화다.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히라야마라는 남자가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곳에서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에는 '이게 뭐지?' 싶었는데 점점 그 반복되는 일상에 빠져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만든 이 영화는 "완벽한 날들"이 어딘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있다는 것을 조용히 속삭인다.
     
    히라야마의 하루는 규칙적이며 정확하다. 새벽에 일어나 화분에 물을 주고, 면도를 하고,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아 마신 후 차에 올라타 카세트테이프를 틀고 출근한다. 화장실을 청소할 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물 흐르듯 움직이며, 점심시간에는 신사 앞 벤치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작은 필름카메라에 담는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에 들러 땀을 씻고, 지하철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와 책을 읽다 잠든다. 이 루틴은 매일 반복되며 주말에는 코인 빨래방과 필름 현상소, 헌책방과 단골 술집이 동선에 추가될 뿐이다.
     

    단순함이라는 선택

    처음에는 이 반복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첫 번째 하루는 호기심으로 지켜보고, 두 번째 하루는 '또 똑같네' 하고 생각할 수 있지만, 세 번째 하루쯤 되면 묘한 평화로움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히라야마의 일상에는 군더더기가 없고, 그가 하는 모든 일에는 정성이 담겨 있으며, 그의 얼굴에는 자족하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잔잔한 미소가 있다. 화장실 청소라는 일을 할 때도 그는 수도승이 수행하듯 집중하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볼 때는 그 찰나의 아름다움을 놓치지 않으려 카메라에 담으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는 온전히 그 순간을 즐긴다. 이것이 단순한 삶이라는 것의 진짜 의미인 것 같다.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계속 궁금했다. 히라야마는 정말 행복한 걸까, 아니면 무언가로부터 도망쳐 이렇게 사는 걸까? 영화를 보고 난 후 찾아본 사람들의 해석은 다양했다. 어떤 사람은 그가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단순하게 사는 거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냥 원래 내성적이고 이런 삶을 좋아하는 거라고 말한다. 나는 그 중간 어딘가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조카 니코가 찾아왔을 때 히라야마가 보여준 따뜻함, 동료와 대화할 때의 편안함, 단골 식당 주인과 나누는 미소를 보면 그가 사람을 싫어하거나 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는 깊은 관계보다는 적당한 거리를 선호하고, 복잡함보다는 단순함을 선택했으며, 그 선택 속에서 평화를 찾았을 뿐이다.
     

    무너지는 루틴

    히라야마의 완벽해 보이는 일상은 생각보다 쉽게 흔들린다. 함께 일하던 후배가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서 업무량이 늘어나고, 조카 니코가 불쑥 찾아와 며칠을 함께 보내면서 그의 루틴은 깨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히라야마의 다른 면들을 보게 되는데, 후배가 무단으로 일을 빠졌을 때 보여준 화난 표정, 여동생이 조카를 데리러 왔을 때 흘린 눈물, 단골 식당 여자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을 보고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려던 모습, 죽어가는 남자와 나눈 대화에서 보인 취약함까지. 이 순간들이 모여 영화를 풍부하게 만든다.
     
    렉서스를 타고 나타난 여동생이 "정말 화장실 청소하는 거야?"라고 묻자 히라야마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이었지만, 여동생이 떠난 후 그는 무너져 운다. 왜 울었을까? 아버지와의 관계, 과거에 버리고 온 삶, 가족과의 단절, 이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올랐을 것이다. 영화에 나오지는 않지만 빔 벤더스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히라야마는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어느 날 아침 호텔 방에서 깨어나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고 모든 것을 버리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 햇살은 다른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고 그 순간을 잡기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을 하게 되면서 가족과의 단절, 과거의 삶과의 이별이 대가로 따라왔을 것이다.
     

    코모레비의 순간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코모레비(木漏れ日), 즉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다. 히라야마는 점심시간마다 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며 햇살이 일렁이는 그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코모레비는 찰나의 아름다움을 상징하는데, 그 순간은 영원하지 않고 금방 지나가버리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름답다. 히라야마가 조카에게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이야"라고 말하는 것도, 영화 내내 과거나 미래보다 현재에 집중하는 것도 모두 이 코모레비의 철학과 연결된다.
     
    죽어가는 남자와 나눈 그림자에 관한 대화가 기억난다. "그림자는 겹치면 더 짙어질까?"라는 질문에 히라야마는 직접 실험해보고 "짙어진다"고 답한다. 그리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건 말이 안 되잖아요"라고 덧붙인다. 관계와 연결, 시간의 흐름, 경험의 축적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더 짙게 만든다. 히라야마의 단순한 삶도 사실은 매일 조금씩 다르고, 매일 조금씩 변하며, 매일 조금씩 짙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빔 벤더스 감독이 말했듯 "언제나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일상 속의 규칙적인 리듬이 아름다운 이유는 모든 사소한 것들이 똑같지 않으며 매번 달라진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의 의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러 번 봐도 새롭게 다가왔다. 히라야마가 차를 몰고 가면서 니나 시몬의 'Feeling Good'을 듣는데, 그의 얼굴에는 미소와 눈물이 동시에 나타난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그 복잡한 감정들이 몇 초 만에 교차하는 모습은 야쿠쇼 코지의 연기력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사람들은 행복의 눈물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들은 슬픔과 후회의 눈물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이 섞여 있다고 생각한다.
     
    히라야마는 기쁘고, 슬프고, 평화롭고, 외롭고, 만족스럽고, 아쉬운 그 모든 감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이 바로 삶이다. 완벽한 날이란 기쁨만 있는 날이 아니라 기쁨과 슬픔, 빛과 그림자가 함께 있는 날이다. 차창 밖으로 햇빛이 비치다가 그림자가 드리우고 다시 햇빛이 비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오르락내리락하며 흘러간다. 히라야마는 그것을 알고 받아들이고 있었고, 그래서 울면서도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Feeling Good'의 가사처럼 "새로운 새벽, 새로운 날, 새로운 삶"이 매일 찾아오고,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다르지만 동시에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나에게 주는 질문

    '퍼펙트 데이즈'를 보고 나서 계속 생각했다. 나는 내 시간의 주인인가? 내가 좋아하는 일들로 하루를 채우고 있는가? 순간순간을 온전히 느끼며 살고 있는가? 솔직히 대답하자면 아니다. 나는 항상 쫓기고, 할 일에 시달리며, 과거를 후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느라 현재를 놓치고 있다. 히라야마처럼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보고 멈춰 서서 그 순간을 온전히 느낀 적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다. 히라야마처럼 살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그는 가족과 단절했고,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며, 야망이나 욕심 없이 살아간다. 그것이 옳은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영화는 그것을 판단하지 않고, 그저 보여줄 뿐이다. 어떤 삶이 더 나은지는 각자가 결정할 문제이고 중요한 것은 자신이 선택한 삶에 책임지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히라야마가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도 수도승처럼 집중하고, 작은 순간들에서 기쁨을 찾으며,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모습은 그래서인지 내게 평화를 주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특별하지 않아도,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마치며

    '퍼펙트 데이즈'는 조용한 영화다. 큰 사건도 없고, 극적인 반전도 없으며, 명확한 메시지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바로 그 조용함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완벽한 날이란 무엇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답을 주지 않지만, 히라야마라는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우리 각자가 스스로 답을 찾도록 만드는 영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하늘을 더 자주 올려다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의식적으로 보려고 하고, 바쁘게 걸어가다가도 잠시 멈춰 서서 지금 이 순간을 느끼려고 노력한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화려하지 않아도 괜찮다. 특별하지 않아도 괜찮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내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작은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다면, 그것이 바로 나만의 퍼펙트 데이가 될 수 있다. 히라야마가 단골 술집에서 듣는 "오늘도 수고했어요!"라는 인사처럼, 오늘 하루를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Designed by Tistory.